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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생활

전두환 사망원인 혈액암 국가장 약력 임기 추징금 환수 백신

by 달달한 강냉이 2021.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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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하기까지

전두환은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입니다.

1951년 육군사관학교에 11기로 입교합니다. 1955년 육사 졸업과 동시에 군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61년 서울대학교 학생군사교육단에서 교관으로 근무를 하였고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육사 생도들을 동원하여 군부 지지 시가행진을 벌였으며 이 일로 박정희의 신임을 얻어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이 됩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 집권 후 노태우 등 육사 동기들과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비호를 받으며 군 내에서 승승장구합니다. 1979년 3월에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 같은 해 10.26 사건이 터지자 계엄법에 의거하여 보안사령관으로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됩니다. 이때 수사본부장이라는 직책과 자신이 이끌고 있던 하나회를 통한 12.12 군사반란으로 군을 장악하고, 1980년 5.17 내란을 일으켜 헌정을 중단합니다.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하여 국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사임함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치뤄진 제11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취임됐으며 이후 7년 단임 대통령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통과시킨 후,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2대 대통령 간접 선거에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제5공화국을 출범시킵니다.(참고로 제11대 대통령 때는 유신헌법에 따라 선출되었기에 제4공화국의 대통령이었습니다.)

임기 말이던 1987년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더욱 거세졌으며, 이를 불식시키고자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지만 오히려 역풍이 일어나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고맙니다. 결국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선 후보 노태우가 6.29 선언을 발표함에 따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진행하였으며 이후 대통령 임기를 모두 마치고 퇴임하게 됩니다.

퇴임 후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운 문민정부에 의해 1995년 노태우와 함께 구속 기소되었고, 이후 반란수괴죄 및 살인, 뇌물수수 등으로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를 받습니다. (피고인 전두환에게 인정된 죄명은 “반란수괴,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살인, 살인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입니다. 이 판결이 확정됨으로써 경호·경비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박탈되게 됩니다.)

하지만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 두 명에 대한 사면 여론이 생겼고 유력 후보 세 명(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모두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었으며, 결국 대선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결단으로 인해 사면되게 됩니다.

출소 후 상당 기간이 흐르고 2021년 8월 악성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 40분경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향년 90세를 일기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사망하게 됩니다. 오랜 벗인 노태우가 사망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때고,

장례는 국가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에 전두환 사망을 끝으로 20세기에 집권한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퇴임 후 생존한 기간은 33년으로 역대 대통령 중 최장 기록에 해당합니다.


 

국가장 국장 국민장, 기준 받는법 금액등 정리

국가장이란? 국가장법 제1조(목적) 이 법은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사람이 서거(逝去)한 경우에 그 장례를 경건하고 엄숙하게 집행함으로써 국민 통합에 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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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두환 전 대통령 주요 약력 연보

전두환 전 대통령 주요 연보 및 약력은 아래와 같습니다.

  • 1931년 경납 합천군 출생
  • 1955년 육사 11기 졸업, 육군 소위임관
  •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지지 시위 주도(군사정변)
  • 1976년 대통령경호실 보안차장보 겸 작전차장보
  • 1980년 5월 17일 전국비상계업 확대 조치
    전국대학휴교령
    국회봉쇄
    계엄군공수특전여단광주투입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무력진압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상임위원장
    삼청교육대설치
    육군대장진급 뒤 예편
    민주공화당, 신민당등 강제해산
    대통령간선제 및 7년 단임제골자로 한 8차 개헌실행
    간접선거로 11대 대통령 당선
  • 1981년 민주정의당 초대 총재
    간접선거로 제12대 대통령 당선
  • 1982년 한국프로야구 창설
  •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
  • 1985년 첫 이산가족상봉 성사
  •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4월13일 호헌조치
    이한열 열사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
    6월 민주항쟁전국확산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6월 29일 선언발표해 직선제 개헌 요구 수용
  • 1988년 대통령 퇴임
    백담사 첩거(~1990년)
  • 1989년 국회 5공비리 청문회
    1994년 5·18광주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이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 혐의로 고소
  • 1995년 검찰 '성공한 쿠데타 처벌할수 없다'며 불기소 처분
    헌법재판소, 불기소 처분취소
    검찰, 12·12 및 5·18특별수사본부 설치 후 재수사개시
    사전구속영장발부 안양교도소 구속 수감
  • 1996년 5·18사건 내란죄·내란목적살인죄혐의등으로 구속기소
    선고내용: 1심 사형 2259억원 추징금선고, 2심 무기징역 추징금 2205억원 선고
  • 2003년 법원 재산 명시 명령에 '예금자산 29만원'기재
  • 2013년 '전두환 추징법' 국회통과
  • 2017년 회고록출간, 조비오 신부 유족등이 사자명예훼손 혐의 형사고소
  • 2020년 사자명예훼손 유죄, 징역 8월 집행유에 2년
  • 2021년 사자명예훼손 혐의, 항소심 재판 출석
  • 2021년 11월 23일 전두환 사망, 향년 90세

2. 전두환 군사정변 이전

1955년 육사 졸업과 동시에 육군 제25보병사단에서 소대장으로 첫 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제21보병사단에서 근무했으며 1957년에서 1958년까지 육군보병학교 교육연대 구대장을 거치게 됩니다.

1959년 초에 미국 특수전 파견교육 장교로 선발되었는데 육군 고급부관학교 제46기 군사영어반에 입교해서 1959년 4월에 수료하게 됩니다. 1959년 5월에 육군 제1공수특전단(현재는 제1공수특전여단) 본부에 배치됩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포트브래그의 미육군 특전단 그린베레로 군사유학을 가며 특수전학교(Special Warfare School)와 심리전학교(Psychological Warfare School) 이 두 교육을 수료 까지 마치고 연말에 귀국을 합니다.

1960년에 다시 미국으로 군사유학 가는데요. 이후 조지아 주 포트베닝의 레인저 스쿨(Ranger School)을 이수했으며, 그 다음에 미 육군보병학교에서 유격훈련 교관교육도 받습니다.(특수전학교와 심리전학교는 노태우와 통역장교를 비롯한 4명의 한국 장교들과 다녔으며 레인저 스쿨은 차지철을 비롯한 5명의 한국 장교들과 같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유격훈련 교관화 교육은 한국인 장교으로서는 전두환 혼자 입교해서 교육을 받습니다.)

전두환 군사정변 이전

그 뒤 다시 귀국하여 제1공수특전단 제1특전대대의 대대본부에서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다가 1961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로 발령받았고 육본에서 근무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육군 ROTC 창단 준비위원으로 발탁되었고 그 뒤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의 ROTC 교관으로 선정되어 서울대학교에서 근무하였고 바로 이때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게 됩니다. (형식적으로만 따지면 서울대학교 ROTC 1기가 전두환의 제자들인 셈이라고 할수있지만 ROTC 교관을 한 지 얼마 안돼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으며 전두환은 이에 동참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민원담당 비서관으로 옮겼기에 실제 교관 생활을 한 건 매우 짧습니다. 참고로 특전사, ROTC 교관등등 기간이 길지 않고 짧게만 근무했으며 여러 조직과 보직을 옮겨 다닌 것도 전두환 군 이력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전두환은 특전사에서 근무했으므로 고된 군생활을 한거 아니냐는 오해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 전두환이 특전사에서 근무한 건 2년이 채 안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많은 기간은 부대에 있지 않았으며 미국 군사유학을 나가 있었기에, 한국 특전사에서 실제로 근무한 기간은 얼마 안 된다고 합니다. 미국에 두 차례 4개의 교육과정을 이수했는데 이 교육과정들 하나하나가 각각 수개월씩의 교육기간이 되는데요. 즉 공수특전단 근무 기간중 대략 절반 이상을 미국 군사교육기관에서 지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전두환 군사정변 이후

1962년 전두환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전역하고 국회의원으로 정계 입문하라"는 제의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군대에도 충성스러운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이를 거절합니다. 이때가 전두환과 몇몇 동기생들이 조직한 육군 내 사조직 하나회로서 확립 되는 시기이입니다. 전두환과 하나회는 군대 내부의 박정희 친위대를 자처하며 정권의 비호를 받아 계속 승승장구합니다.

당시 소령, 중령이었던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인사과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제1공수특전단 부단장을 거쳐갔으며 1967년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장이 되었습니다. 전두환은 이때 청와대의 경비가 부실하다는 이유를 들어 박격포를 청와대에 설치했으며, 이후 벌어진 1.21 사태 때 북한 김신조 일당이 서울로 침투하여 국군과 교전을 벌였었는데, 이때 수경사 30대대장이었던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30대대가 박격포로 많은 조명탄을 계속 쏘아 올려 밝게 비추어, 김신조 일당의 소탕과 생포에 적잖은 역할을 하게됩니다. 이때의 공으로 전두환은 박정희의 신임을 더욱 얻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전두환 군사정변 이후 / 출처 : 연합뉴스

전두환은 소령은 동기들 중 제일 늦게 달았지만 1969년에 육사 동기들 중 최초로 대령으로 진급합니다. 1970년 육군 제9보병사단 제29보병연대(現 제29보병여단. 2021년 1월 1일부로 연대에서 여단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었는데, 당시 상관들에게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9사단장이자 이후 육군특수전사령부의 2대 사령관인 조천성 장군이 말하길 '사병들은 마실 물도 마땅치 않은데 전두환은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테니스나 치고 앉았다'고 말하며 29연대장에서 해임시켜야 한다는 보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전두환의 연대가 군공이 전혀 없자 전두환은 무기밀매상으로 부터 적성화기 다수를 구매하였고 구매한 것을 노획물이라고 속여 상부에 바쳐 있지도 않은 군공이 있다고 속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전두환의 거짓말은 바로 들통나게 되는데, 이유는 전두환이 노획했다는 총기가 사용한 흔적이 없어 약실과 총열이 깨끗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전두환이 무기밀매상으로부터 구매한 무기의 수는 소화기 115정, 공용화기 13문, 수류탄 42개, 실탄 2,191개, 포탄 31개, 기타 냉병기 등 다수 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베트남전 파병 이후 복귀한 연대장급 이상은 충무무공훈장을 받는 관례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두환의 경우는 직속상관인 9사단장 조천성, 주월사령관 이세호가 전두환에 대한 훈장 수여에 반대한 일화가 있는데요. 이유는 인사오류, 민간인 상대 문제 행위, 작전지휘권을 참모 이하에게 맡겨 놓은 사례, 전투수행능력 부족, 무기 밀매 및 적성화기로 거짓보고(없는 군공 만들기), 연대장 부임 이후 잦은 파티 등으로 부정적 평가를 쏟아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보고에도 결국은 훈장을 수여 받게 되는데요. 이와같은 일화 때문인데 이세호는 괘씸죄로 낙인찍혀 전두환 집권 이후에 재산을 몰수당하는 등의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 일로인해 전두환의 준장 특별진급은 미뤄졌으며 대령이 부대장인 1공수특전단의 단장이 됩니다. 그러다가 1972년 9월에 제1공수특전단이 제1공수특전여단으로 증편되어 부대장이 준장급인 보직이 되자, 아직 대령이었던 전두환은 정식 여단장이 될 수 없으므로 제1공수특전여단장 '직무대리'라는 직함으로 계속 부대장을 맡게 되는데요. 이후 전두환은 1973년 1월에 임기제 준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정식으로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됩니다. 이 여단장 시기에 전두환에게 우수 훈련병사 표창장을 받았던 사병 중 한명이 지금 유명 정치인을 넘어 대통령이 되었는데요. 그 사람이 바로 문재인 대통령입니다. 표창장 사진도 공개한 적이 있으며 심지어 대통령후보 경선토론회에서도 본인이 밝힌바 있습니다.

전두환은 1974년 1월, 김복동, 손영길, 최성택 등과 함께 육사 11기 최초로 정식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1976년에는 대통령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임명되었고, 보안차장보직을 겸직하게 됩니다. 이후 1977년 2월 1일부로 전두환은 결국 소장진급을 합니다. 소장 2차보직으로 전두환은 1978년 사단장 중에서 가장 요직인 육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이 되었는데요. 1사단장으로 있던 시기에 1사단이 제3땅굴을 발견하는 성과를 올리게 되었고 1979년에는 요직인 국군보안사령관이 됩니다. (전투 특기들이 대장으로 진급하는 게 대세인 지금, 대부분 안보지원사령관을 마치면 전역하기 때문에 안보지원사령관은 그저 그런 보직이라고 합니다.)

4. 전두환 군사반란

국군보안사령관으로 재직 중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한 상황에서 국군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10.26 사건 수사를 맡게됩니다. 그러던 중 군사반란을 일으켜 계엄사령관이였던 정승화를 연행하였으며 이후 군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는 보안사령관에 앉고 주어진 임무대로 차지철, 그리고 김재규를 견제할 각종 방안을 연구하였으며 10.26 이후 그 방안들을 바탕으로 손쉽게 권력을 장악합니다. 유신 권력의 1인자와 두 2인자가 모두 사라졌을 당시 두 2인자를 견제하는 위치에 있었던 전두환이 부상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습니다. 당시 전두환은 6인위원회(전두환, 노태우, 황영시, 유학성, 김윤호, 차규헌)를 구성하여 장성 진급을 결정하게 됩니다.

1980년 3월 1일부로 중장으로 셀프 진급한 후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직하였으며 5.17 내란을 통한 반란으로 헌정을 중단시킵니다. 대통령 직선제 등을 요구한 시위인 서울의 봄 이후 벌어진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을 진행하였고 새로운 폭압적 독재 정권을 예고합니다. (특히 항쟁 중인 5월 21일 오후 1시 도청 앞 집단발포의 발포명령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요. 현장명령자는 조창구이지만, 그에게 발포명령을 내린사람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8월 5일 대장으로 진급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거쳤으며 그렇게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반란은 아직 김재규에 대한 재판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발생했습니다. 정권 장악 이후 대통령직을 공식으로 이어받기 위해 전두환은 군 전역을 준비했고 대장 진급 16일만인 1980년 8월 21일에 예편하게 됩니다.(헌법상 대통령은 민간인이어야 합니다.)

전두환은 쿠데타로 집권해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1980년 초 백곰 미사일 사업을 취소하게 됩니다. 그리고 플루토늄 반납, ICBM 개발 계획 취소, ADD 해체 등 이전 박정희 정권에서 대미관계 악화에 따라 추진하였던 자주국방 정책의 방향을 모두 취소합니다. 또한 국방을 미국에 헌납하였고, 미국과 거대 무기 도입 계약을 체결하는 등의 방식을 진행함으로써 미국에게 집권 보장을 받게됩니다. (이덕에 노태우 정부에서 제일 먼저 이야기된 것이 전작권 반환이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이후 전두환은 1980년 8월에 정치인, 군인, 교수, 기업인, 종교인 등으로 구성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신설함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회악 일소를 명분으로 사회정화운동을 실시하였는데요. 이는 정치계와 사회 저변에 대규모 탄압작전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한국판 굴라크'로 불려진 삼청교육대와 삼청계획 5호에 덤으로 낀 사회보호법 역시 이 당시 생겼습니다.(참고로 사회정화운동은 1980년 국보위 창설 시부터 '정화운동기획단'으로 출발하였으며 11월부터 사회정화위원회로 계승되었고 노태우 시기인 1989년에 해체되어 민간단체인 '바르게살기운동 중앙협의회'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회보호법은 범죄자가 유사한 죄로 2회 이상 실형을 받고 그 형기의 합계가 3년 이상인 자가 다시 유사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등의 사유로 인해 상습성이 인정될 때는 형량과 상관없이 추가로 장기간의 보호 감호 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규정하는 법입니다. 이는 1989년 지강헌 탈주 사건과 보호감호 중 사망자 속출 등 장기간 보호감호 처분에 따른 반발과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는데요.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1989년 사회보호법을 개정해 보호감호 기간이 7년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으나 이후 사회보호법상의 보호 감호가 ‘사실상의 이중 처벌’로 위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기에 2005년 8월 4일경에 폐지되게 됩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을 명분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는데요. 진행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은 다득표를 얻어 결국 대통령직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선거는 장충체육관에서 소수에 의한 간접회의로 열렸는데요. 때면에 이후 평생 오명으로 따라다니게 됩니다.

5. 제11대 대통령 전두환

전두환은 취임하자 연좌제를 폐지, 야간통행금지, 심야영업금지령을 해제합니다. 하지만 이후 야간통행금지는 잠시 부활했지만 곧 완전히 폐지되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헌법개정안을 공고하였습니다.

또한 정당해산령을 내려 여러 정당을 해산시켰으며 1980년 10월 27일에 국민투표를 거쳐 새 헌법 7년단임 대통령제를 공포하게 됩니다. 그리고 1981년 1월, 새로 창당한 민주정의당에 입당, 당 총재에 취임 후 새 헌법에 따른 간접선거로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게 됩니다.

전두환 제 11대 대통령 간접선거

6. 제12대 대통령 전두환

사실 간접선거라 결과는 뻔했지만, 구색을 맞추기 위해 당시 개표생중계 방송을 KBS에서 했으며, 초대형 스튜디오를 만들어 전광판으로 실시간 현황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후보별로 투표하는 것이 아니었고 찬성과 반대 항목밖에 없는 투표였습니다. 투표 결과를 보자면 반대는 겨우 6%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2채널에서 하던 오락 프로그램 100분쇼에서도 전두환 대통령의 축하와 지지로 이루어진 특집 방송을 했으며 당시 유아동 프로그램에서도 패널들이 전두환 대통령 찬양 일색의 멘트를 날렸습니다. 취임 전날에는 취임 경축 전야제라고 해서, 장충체육관에서 밤새 공연했고 이를 생중계하기도 했습니다.

전두환은 취임 후 허문도가 주장한 3S정책을 시행했습니다. 3S정책이란 스포츠(Sports), 성 개방(Sex), 영상 산업 진흥(Screen)를 말합니다. 이는 한국, 일본에서 공통적으로 있었던 정부에 대한 불만을 돌리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두발 및 교복자율화를 실시하였지만 교복자율화는 학부모들과 여러단체에 항의가 들어와 노태우 정부 때 부터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부터 대학입시 경쟁이 매우 치열해졌습니다. 전두환 정부는 사교육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학원과 과외를 폐지하는 강압적 조치를 취했는데요. 그러나 사회 전반적인 엘리트화를 전두환은 추구하였고, 청소년 시절에 대학입시로 자살하는 일이 이때부터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대학은 거의 매일 전투 상태였는데요. 전두환 정부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할 생각을 못하도록 학원안정법을 제정하였으며 녹화사업을 실시했습니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전까지 학내에 정보형사와 경찰 프락치가 항시 상주하였으며 거의 매일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학생들도 사수대라는 민병조직을 만들었고 냉병기 훈련을 하고 폭력시위에 앞장세웠습니다. 그 절정이 동의대 사태와 10.28 건국대학교 항쟁입니다. 86 아시안게임, 1988 서울 올림픽이라는 세계적 이벤트에 대해서도 학생권에서는 국민들, 특히 도시빈민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올림픽을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상당히 반발했었습니다.

제12대 대통령 전두환 간접선거

당시 방송국에서는 이들을 '좌경의식분자', 즉 빨갱이라면서 한창 내리까는 프로파간다를 많이 보도했었습니다. 그래서 최근 중장년층들에게 학생운동권 출신의 선입견이 많이 안 좋은 것도 그이유입니다. 학원, 과외 폐지는 전두환이 퇴임한 이후 집권한 노태우 정부 때 부터 현실성이 없다는 문제로 철회하게 됩니다.

전두환은 집권 직후 록히드 마틴과 F-16 도입 계획을 체결하였는데요. 이후 전두환 집권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공개적 석상에서 전두환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게됩니다. 또한 1983년 11월 전두환은 한국을 공식 방문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핵개발 계획중지를 약속하였고 박정희 대통령 당시 추진한 미사일, 핵 등 자주 국방 계획은 전두환 집권을 하면서 모두 폐기됩니다. 훗날 노태우 정부는 미사일 설계도까지 전부 없어졌다라며 한탄했다고 합니다.

한국군의 지휘권은 미국에 있었는데, 어떻게 군대가 이동하여 광주에서 발포하고 학살을 저지를수 있냐는 것. 그 당시에는 매우 심각한 논쟁 거리였죠. 또한 유교문화가 사회 뿌리 깊던 때라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은 대국(大國) 미국이 자신들을 도우러 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오히려 한국의 무기 도입을 감사해하며 전두환과 악수하고 전두환을 지지하여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신군부의 탄압을 방관한 미국에 대한 반감 역시 커졌습니다.

경제개발이 시작된 1962년대로부터 20여 년이 넘게 경과하면서 산업 고도화가 이루어졌고, 전두환 집권기에 이르면 중화학공업 생산 규모가 경공업 수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는 중공업, 제조업의 급속한 팽창은 오일쇼크와 겹쳐 79년 하반기부터 시작해 1980년에 절정을 이루던 대불황극복 과정에서 대대적인 중공업정리를 하고 김재익을 등용하여 1945년이래 40년 가까이 지속된 높은 물가상승률을 재임기간동안 한 자릿수로 떨어뜨립니다. 컬러 텔레비전 수상기가 보급된 것도 이 시기입니다. 참고로 박정희 대통령은 컬러 TV가 사치품이라 금지했는데 미국 컬러TV 방송은 60년대부터 보편적이었습니다.

1983년 미얀마 방문 때 북한 스파이의 표적이 되어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시각에 현장에 없었기에 휘말리진 않았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하나회의 영향력이 컸었는데, 잘못하면 또 다시 군사반란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습니다.) 1986년에는 최초로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였고 평화의 댐 건설 홍보를 시작했으며 1987년에는 초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전두환 정부와 부산직할시 사회가 노숙자, 행려병자들, 고아들을 비롯하여 멀쩡한 사람들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통금시간 이후 돌아다니는 사람은 전부 잡아들여서 무차별적으로 끌고 가 불법적 감금 및 강제 노역을 시킨 기관입니다. 박인근 원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의 갖은 악행이 35명의 원생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며 집단탈출한 끝에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음에도 전두환은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라고 말하고 압력을 가해 사건을 덮어버립니다. 이외에도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으로 정권에 대한 반발과 대통령 직선제 등 민주화 요구가 강해졌으나 1987년 대통령 간선제를 유지하겠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되고, 간선제의 여당후보로 노태우를 내세우게 됩니다. 이후 1987년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아 숨지는 사건을 계기로 6월 항쟁이 일어나게 되자 6.29 선언을 통해 결국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지만 노태우를 후계자로 세우고 정당의 우두머리로 수렴청정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막상 노태우가 집권하고서 전두환 색깔을 자의 반 타의 반 지워나갔고 3당 합당을 통해서 여권을 장악하게 될 김영삼의 등장으로 결국 그의 계획은 실패하게 됩니다.

7. 전두환 퇴임과 구속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통하여 창당된 민주자유당에서 주도권을 잡았으며 구 민주정의당계를 제압하고 대통령직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임기 중반에 접어든 1995년 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전격 구속이 진행됩니다.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구속 사건의 시작 죄목은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상관살해, 상관살해미수, 초병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등으로 인한 재판이었습니다.

김영삼이 취임후 한참 있다가 본격적인 과거 청산이 시작되었는데, 사실 이미 12.12사태의 당사자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22명이 전두환을 고발하였고 이에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며 공소권 없음을 내세워 거절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3건의 헌법 소원으로 헌법재판소는 성공한 내란이라도 처벌 할 수 있음을 판시하였으며 이 후 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되어 시효 문제를 해결하였고 합법적으로 전두환을 잡아다 법정에 세우게 됩니다.

구속은 노태우 1995년 11월 16일, 전두환은 1995년 12월 3일에 진행됐으며 구속한 직후 검찰에서 12. 12 사태의 집권부터 5. 18까지 피의자 신분으로 전두환을 당시 서울지방검찰청에 1995년 12월 2일 오후 3시에 소환하여 조사를 진행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미 위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앞서언급한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워 기소유예로 마무리지은 사건) 정부가 정치적인 이유로 특별법까지 제정하여 재조사 한다며 자신은 단지 법을 존중하기 위해 사법부의 조치만 수용할 것일 뿐 라는 '골목성명'을 연희동 자택 앞에서 발표하고 그 직후 현충원에서 5분간 참배한 다음 그대로 고향인 합천으로 내려가버립니다.

전두환 퇴임 구속

검찰은 이런 전두환의 행동을 피의자의 도주행위로 간주하여 관할법원인 서울지방법원에 구속영장을 청구합니다. 그리고 전두환이 원하는 대로 사법부의 조치에 따라 그 다음날 새벽 합천 생가에서 검찰에 체포되었고 그대로 안양교도소로 압송되게 됩니다.

물론 구속된 전두환이 얌전히 수사에 협조한 것은 아닙니다. 구금된 즉시 구속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안양교도소에서 단식투쟁을 보름 동안 벌이다가 탈진과 영양실조상태에 따른 건강 악화로 1995년 12월 21일 새벽에 국립경찰병원으로 이송되게 되는데요. 검진 결과 전해질과 간기능 등 여러 검사가 정상이었으며 단식으로 인한 두통과 현기증 등의 탈수증세가 있는 것 외에는 건강에 큰 지장이 없다는 진단을 받게됩니다. 하지만 샤워시설, 싱크대, 다용도실, 응접실에 갖추어진 10평 안팎의 VIP특실에서 3월 2일까지 두달이 넘는 70여일 기간동안 입원치료를 받았습니다.

첫 공판은 1996년 2월 26일에 진행되었으며, 그동안 전두환은 경찰병원에서 쉬고 있었으므로 공판날 교도소 측이 병원을 방문해서 법원으로 이송하는 촌극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공판에서 너무 정정한 모습으로 나오니 다시 안양교도소로 재수감되게 됩니다.

재판 진행 과정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구속 이전 1995년 10월경 육군사관학교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이후 피고인의 신분으로 1심 재판정에서 몇 달 만에 재회하게됩니다. 오랜맨의 재회에 전두환이 하는 말이 "자네 구치소에서 계란후라이 주나?"였습니다. 노태우는 "안 준다."라고 대답하였고 전두환도 "우리도 안 줘."라 대답하며 두 사람의 짤막한 대화는 끝이 납니다.

백담사에 칩거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노태우 그 놈이 아무리 대통령이라도 나한테 이런 식으로 대접하면 귀싸대기 맞는다."라며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었는데 죽을지도 모르는 위기 앞에서 오랜 사적인 감정을 턴 듯 보였습니다.

전두환은 1심 마지막 최후진술에서 다음 서면을 제출하며 "그들은 아무 죄가 없다. 내가 다 책임지겠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판결과 1심에서 반란 수괴와 부패 혐의로 거액의 추징금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상고하지 않고 검찰이 너무 처벌이 약하다며 상고를 합니다. 이에 결국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의 서울고법 판결을 확정짓게 됩니다.

전두환 노태우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이때문에 금고 이상의 형을 확정받음으로써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 법률>에 의해 경비, 경호를 제외한 연금, 치료, 비서관 지원 등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모두 박탈당합니다. 여기에는 의전 및 예우, 연금, 비서관, 기념사업추진비, 사무실제공, 前 대통령 칭호도 포함됩니다. (호칭 설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민주당계 정당, 진보 정당 지지자는 국가가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하지 않는 대통령에 대해서 전(前)자를 붙일 필요 없다고 헀으며, 보수 정당 지지자는 예우에 대한 문제는 법원 판단에 맡겨야할 영역이고, 존중해야하지만 역사적 인물에 대한 사실의 인정으로서 전(前)자를 붙이는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전(前)자를 넣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법률상 국가장은 가능하지만 국립묘지 안장은 불가능합니다.

무기징역이었으나 김영삼은 대선 후 임기 내의 기간에 추징금 회수와 사실상 사면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3명의 대선 주자들에게 허가를 구하기까지 했는데요. 이 계획은 자서전으로 밝혀진 지금까지도 대선 후보들의 공약과 김대중의 요구란 미명 하에 사면이 진행되었단 이야기가 대중에 많이 퍼져있듯이 당시엔 폭로되진 않았으나 이인제에 비해 지지도에서 열세에 밀렸기 때문인지 이회창이 추석 전에 둘을 사면시킬 것을 김영삼에게 직접 건의하겠단 발언을 했고, 이로 인해 곧 다가오는 15대 대선 유세에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 모두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는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결국 15대 대통령 선거 이틀후인 12월 20일, 김영삼 정부는 그를 사면복권 하게 됩니다. 당시엔 김영삼 정부 및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전노사면에 여야 모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노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추징금은 그대로 였으며 이때 유명한 추징금을 내라고 하니 통장에 29만원 밖에 없다는 드립을 치면서까지 끝까지 내지 않자 두고두고 문제가 됩니다.

8. 전두환 출소 후 근황

출소 후 전두환은 군인시절 살던 서대문구 연희동에의 안전가옥에서 경호를 받으며 골프를 치러 놀러다니는 등의 호화로운 생활을 이어가게 됩니다. 이후 2003년 SBS와의 인터뷰 중 광주 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발언하여 논란이 되었으며 2013년 7월 16일 검찰이 시공사 본사와 기숙사, 연천 허브빌리지 등 그의 자택 및 그와 관련된 기업에 전격적인 압수수색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압수한 미술품을 경매에 내놓으니 낙찰총액 72억 원을 기록하며 마무리 됐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약 1,200억 원의 추징금이 남아있는 상태였으며 2013년 9월 아들로 하여금 추징금 완납 계획을 발표하기는 했으나, 아직 전부 납부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2015년 9월까지 추징금을 완납하지 않았으며 추징금이 선고된 년도가 1997년인데 24년째 추징금을 완납하지 않은 기록을 세웁니다.

90살이라는 나이에도 여전히 정정한 모습을 보여주며 청와대 행사에 꾸준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동 시대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이 노환으로 사망하고, 노태우도 병환으로 2021년 10월 26일에 사망한 것과 비교된 적 있었습니다. 전두환은 자신이 집권기간 동안 줄곧 김대중을 탄압했으며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하여 죽이려 했으나, 본인을 자주 청와대로 초청해 국정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등 전직 대통령으로써의 예우를 충분히 갖췄다고 이야기하며 이점에 대해 전두환은 김대중에게 "항상 감사하고 존경한다"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이 죽기 직전엔 그의 병문안도 가고 사망 이후 영결식장에도 참석해 애도를 표했습니다.

전두환 출소 후 당시 근황

반면에 김영삼과의 관계는 계속 껄끄러웠습니다. 전두환은 집권기간 김영삼을 가택연금 시켜 아들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김대중이 미국에서 입국할 당시 김영삼이 마중을 나가려 하자 전두환이 군인들을 보내 꼼짝도 못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정계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재임 당시 김영삼을 줄곧 탄압했었죠. 이후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자 하나회와 5공을 박살냈으며 전두환을 감옥에 넣어 대통령 예우를 받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김영삼은 퇴임 후에도 전두환을 대통령감이 아니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김영삼이 전두환을 망신을 준 유명한 사례로는 2010년 전직 대통령 회동 자리를 갖을때 김영삼은 이명박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전두환이는 왜 불렀노? 쟈는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는 못간다." 라고 말한바 있으며 오찬 시간에 전두환이 "와인 더 없느냐"라고 말하자 김영삼이 "니는 청와대에 술 처무러 왔나?"라고 말하자 당시 전두환은 김영삼의 발언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으나, 2번째 발언을 듣고난 후엔 일찍 자리를 떴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 2015년 김영삼이 사망했을 때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문하는 모습에 상당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기자가 "김영삼을 용서했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으나 끝까지 묵묵부답이었다고 합니다.

9. 전두환 회고록 명예훼손 피소

2017년 박근혜 탄핵으로 정국이 어수선할 때 2천 페이지 분량의 3권짜리 회고록을 내놓습니다. 회고록은 자신에게 유리한 서술된 내용으로 비난 여론이 일었으며 전두환 회고록은 결국 법원에서 발매를 금지를 하게 됩니다. (참고로 전두환 회고록 출간 이전에는 아내 이순자가 먼저 회고록 당신은 외롭지 않다를 출간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5.18 관련 내용이 실려있는 1권의 발매만 금지되었으며 그 이후의 내용이 실린 2, 3권은 정상적으로 발매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1권의 문제가 되는 부분을 까맣게 처리해서 다시 내놓게 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어서 회고록은 다시 출판, 배포가 금지 되었습니다.

회고록 내용 중 고 조철현 비오 신부를 ‘가면을 쓴 사탄’,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을 해놓습니다. 이에 조 신부의 유족들중 고인의 조카인 천주교 광주대교구 조영대 프란치스코 신부가 대표로 전두환을 사자명예훼손죄 혐의로 형사 고소하게 됩니다.

이후 전두환은 재판 연기 및 재판부에 서울 이송 신청을 했지만 법원은 5월 28일로 예정되었던 재판의 연기만 받아들였고 이송 신청은 기각합니다. 이후 2018년 8월 27일 첫 공판이 열리게 됩니다. (전두환이 재판 출석하던 날에 초등학생이 전두환 물러가라고 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전두환 회고록

전두환의 변호인 측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18년 들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기에 불출석하겠다고 밝힙니다. 전두환은 '도저히 광주에서 재판받지 못하겠다'며 대법원에까지 재판관할 이전 신청을 다시 항고했으나 기각되었으며, 2019년 1월 7일에는 알츠하이머에 이어 독감에 걸렸다고 부인 이순자 여사가 대신 인터뷰까지 하며 재판에 불출석하게됩니다. 하지만 건강이 안 좋은데 골프를 쳤다는 의혹이 논란이 되자, 측근들은 운동과 법정 진술은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광주지법은 3월 11일로 재판을 다시 연기했고 끝내 구인장까지 발부했습니다.

한편 2018년 12월 20일에 서울시에서 전두환의 재산을 압류하였는데 그 이유가 세금체납이었습니다. 체납금은 9억 8천만원에 달했고 연희동의 그 대저택도 추징금을 받기 위해 '공매'로 넘어가며 전체 땅과 건물을 합친 감정가는 약 102억 정도 였다고 합니다.

2019년 3월 11일 부인의 동석 하에 경찰 경호팀의 호위를 받고 재판 출석을 하였으며 이는 23년만에 피고인 신분으로 다시 법원에 출석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광주지방법원 장동혁 부장판사의 주재로 열린 첫 공판에서 전두환은 거동이 불편하다는 주장과는 달리 명확하게 자신의 육성으로 기소된 모든 혐의에 대하여 전면 부인합니다. 그리고 이전에도 계속 요구한 재판관할이전 신청도 진행했으나 담당판사는 일단 심리를 계속 진행하면서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다음 공판기일은 2019년 4월 8일 오후 2시 광주지방법원이었으며 30년만의 광주 방문에 그 일대는 난리가 나게 됩니다. 아침부터 전두환을 규탄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전두환을 태운 차량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고성이 터지는 것은 물론 몸싸움이 벌어지며 아수라장이 되어버립니다.

전두환은 인터뷰를 일체 거부하고 경호 속에 실내로 이동했지만 하차 직후 움직이기 버거울정도로 인파가 몰렸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법원에서 나올 때에도 소동이 일어났으며 이에 충격을 먹었는지 귀가길에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방문하는 일이있었습니다.

또한 법원 청사내로 들어가려는 전두환을 한 시민이 제지하려하는데 경호원한테 발길질을 당해 분위기가 극으로 치달았으며 법원 옆 광주동산초등학교에서 초등학생들이 전두환에 대해 항의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도 전두환 의 악행을 돌아보며 형제복지원 사건이 자신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재조명되기도 합니다.

전두환 혈액암 / 출처 : mbc

전두환은 재판 과정에서 계속 알츠하이머 투병 중임을 주장해 왔으나, 2019년 11월 8일 정의당 임한솔 부대표가 전두환이 홍천군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거동과 의사소통이 원활한 신체건강한 모습이 담긴 영상을 공개하여 논란이 되었습니다. 당시 법원출석 당일 90살 먹은 사람이 몰린 인파를 제치는 모습에서 "알츠하이머는 구라 아니냐"는 얘기가 많았기에 해당 영상을 보며 그럼 그렇지 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2020년 4월 27일 재판 참여를 위해 다시 광주 법원으로 내려갔으며 10월 5일. 검찰은 전두환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합니다. 그리고 광주지방법원이 11월 30일, 사자명예훼손죄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고 이날 재판을 위해 광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사죄를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말 조심해 인마!"라며 역정을 내서 논란을 빚기도 했습니다. 노태우 전두환의 차이를 이야기하자면 2019년 들어 신군부의 두 수괴 중 노태우 측은 늦게나마 5.18 유족에게 사죄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전두환과는 비교 되었습니다.

이후 2021년 7월 5일 전두환은 2번째 재판에 불출석하며 알츠하이머 병력을 주장했으나 자택 앞 골목에서 멀쩡하게 산책을 하고, 기자에게 호통치는 모습이 기사화되어 다시금 알츠하이머 발병설의 진실여부가 논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급격히 노쇠한 모습과 집주변을 배회하는 행동, 갑자기 호통을 치는 모습등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증상으로 볼 수 있다는 반론 역시 있었습니다.

2021년 8월 9일 전두환은 결국 항소심 3번째 재판에 출석하게 됩니다. 전두환 측 변호인은 '재판부에서 피고인이 출석하지 않으면 신청한 증거나 증인들을 받아줄 수 없다는 취지로 얘기해 부득이 출석하기로 했다'고 밝혔으며, 결국 광주지방법원에서 항소심 재판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재판 도중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잘 쉴 수 없다고 하였고 재판장의 동의를 얻어 잠시 퇴장하였으나 7분 만에 다시 돌아옵니다.

마지막 재판은 2021년 11월 29일 항소심 결심공판이 예정되었으나 전두환이 사망함으로써 실질적인 재판은 모두 끝나게 됩니다.

10. 전두환 사망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 45분경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으며 앞서 언급한것과 같이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지난 8월 혈액암 진단을 받은 후 이전과는 다르게 급격히 건강이 악화된 듯한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었는데요. 결국 202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2021년 10월 26일에 노태우가 사망한 지 정확히 4주가 지나서였으며 백담사로 유배를 떠난 지 정확히 33년이 되는 날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생전의 치열한 정적이기도 했던 김영삼의 6번째 기일 다음날이기도 합니다.

자택에서 화장실로 이동하던 중 쓰러져 숨졌다고 합니다. 당시 부인 이순자가 쓰러진 전두환을 발견하였고 경찰 경호대에 즉시 연락해 심폐소생술을 진행 했지만 119 구급대가 도착하기 전에 심장박동이 멎었다고 합니다.

초대 이승만부터 시작해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보다 오래 생존한 두 대통령인 전두환과 노태우 역시 모두 사망하게 되어 전두환을 마지막으로 20세기에 집권했던 대한민국 대통령은 전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빈소는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으며 시신이 자택에 있는 동안에는 전두환의 최측근 인사였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과 고명승 전 3군사령관이 조문을 다녀갔다고 합니다.

노태우의 국가장에서 이철희 정무수석비서관은 전두환의 국가장은 "일고 가치도 없다."고 밝힌 적이 있고,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도 유족을 대신하여 가족장으로 치르겠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이승만 전 대통령과 윤보선 전 대통령의 예에 따라 운구 과정에서 경찰 경호는 있으며 이는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윤보선 이후 31년만에 가족장으로 지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참고로 최규하와 노무현은 국민장, 김대중은 국장으로 장례를 치뤄으며 국가장 통합 이후엔 김영삼과 노태우가 국가장으로 장례를 치뤘습니다.) 한편 전두환의 사망을 공식 발표한 민정기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전두환이 화이자 백신을 접종 받은 뒤에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말에 전두환의 죽음은 백신 부작용 때문이라고 주장도 나왔으나 이는 지나친 억측이라며 논란을 일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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